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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정책 전문가 좌담 - 조선일보

조회3,280 2009.07.25 18:09
정민화

전문가 좌담
복지정책, 극빈층에 집중 비정규직·영세업자 등 고용보험 사각지대 살펴야
근로소득세 환급 늘리고 공(公)보육제 확대 시행… 일할수록 혜택 받도록


밤낮없이 부지런히 일해도 소득이 최저생계비(4인 가족 기준 월 132만6609원)에 못 미치는 \'워킹푸어(Working Poor·근로빈곤층)\'가 300만명을 헤아린다. 이들은 알뜰살뜰 아껴도 식비, 방값, 자녀들 학비를 내고 나면 통장 잔고가 \'0원\'이 된다. \'억척스레 일하면 잘살 수 있다\'는 믿음, \'없는 집 자식도 본인만 똑똑하면 명문대에 간다\'는 희망이 이들에겐 \'남의 얘기\'다.

당장은 간신히 중산층 살림을 유지하고 있지만, 가족 중 한 사람이 실직하거나 몸이 아프면 언제든 워킹푸어로 떨어질 수 있는 \'워킹푸어 예비군\'도 불어나고 있다. 고용이 불안하고 보수가 박한 이른바 \'나쁜 일자리\'가 늘어난 탓이다.

문제는 워킹푸어로 몰락한 사람들을 다시 중산층으로 끌어올릴 대책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지난 22일 조선일보사에 모인 전문가들은 \"정책은커녕 정책 설계의 기본이 되는 실태조사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좌담에는 성신여대 경제학과 강석훈(姜錫勳) 교수, 한국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柳貞順) 소장, 한국개발연구원(KDI) 유경준(兪京濬) 선임연구위원, 세신철강㈜ 장준배(張俊培) 대표이사, 한국사회복지사협회 조성철(趙聖鐵) 회장이 참석했다.

\'인생 역전\' 줄고 \'인생 유전\' 넘쳐

조성철 회장=\'인생 역전\'보다는 \'인생 유전(遺傳)\'이라는 말이 더 익숙해져 버렸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능력 있고 품성 강한 사람이라면 일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이 점점 쪼그라들고 있다.

장준배 대표=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5개 은행에서 8500명이 퇴출됐다. 나도 그중 하나다. 충청은행 과장으로 근무하다 나와서 김밥집을 열었는데 2년 만에 종자돈 5000만원만 날렸다. 그 뒤로 11년이 흘렀다. 잘린 사람들 중 잘 된 사람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이 그 당시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못 나갔다. 대기업 여신을 심사하던 동료는 요즘 야간에 택배회사에서 화물을 정리하고 새벽에 퇴근한다. 나이 50살에 월 150만원을 버는 \'시급(時給) 인생\'이 된 거다. 나도 작년까지 워킹푸어였다. 세신철강에서 사무를 보면서 월 200만원을 벌어 아들·딸 학비를 댔다. 은행 대출을 받아 세신철강을 인수한 게 작년 11월이다. 지금은 월 매출 1억2000만원을 올리고 있다.

류정순 소장=11살짜리 초등학생이 지방은행에 다니다 구조조정된 아빠한테 묻더란다. \"아빠는 왜 애초에 농협 안 갔어?\" 가슴 찢어지는 얘기다. 일선에서 상담하다 보면 워킹푸어 가정은 단순히 곤궁한 데 그치지 않고, 가정 자체가 깨지기 쉽다. 그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유경준 연구위원=통계를 보면 워킹푸어는 외환위기 때부터 급증했다. 처음엔 경기(景氣)가 안 좋아서 회사를 나왔는데, 경기가 좋아져도 다시 직장에 돌아가지 못했다. 경기적인 요인이 구조적인 요인으로 굳어 버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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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조선일보 본사에서 열린 ‘워킹푸어’ 문제에 대한 좌담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류정순 한국빈곤문제연구소장, 장준배 세신철강 대표, 유경준 KDI 선임연구위원, 조성철 한국사회복지사 협회장,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정교한 빈곤정책 없는 게 더 문제\"

강석훈 교수=워킹푸어가 증가한 배경은 단기적으로는 경기 요인이 컸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 기술 진보와 세계화(globalization)이다. 최근에 삼성전자가 40나노급 D램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가 그걸 만들어 내면 GDP(국내총생산)는 늘어난다. 하지만 숙련 근로자에 대한 수요가 조금 늘어날 뿐 전체 일자리는 크게 늘지 않는다. 또, 세계화로 인해 우리 근로자들은 이제 동남아 근로자와 경쟁을 해야 한다. 가족 해체와 인구 고령화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류정순=정부도 책임이 있다. 외환위기 때를 돌아보자. 실직한 사람들이 자영업으로 몰려갔다. 정부가 교통정리를 해 줬어야 하는데, 오히려 창업자에게 신용을 풀었다. 작게 말아먹을 수 있는 사람들을 크게 말아먹게 한 거다.

유경준=그동안 정부는 양극화를 고민하면서도 정교한 빈곤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2008년 현재 비정규직 중 39%만 고용보험에 가입해 있다. 경기 침체로 가장 타격을 받는 계층은 비정규직과 영세자영업자인데, 정작 이들은 사회안전망이 떠받쳐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빈곤층으로 떨어진 사람들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리는 노력과 함께 중산층과 빈곤층의 중간 지점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사람들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막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류정순=영세자영업자들과 일용직을 보호하는 안전망이 없다. 직장에 나가는 근로자는 고용보험이 있어 실직하면 실업급여라도 받는다. 영세자영업자와 일용직에겐 최소한의 보장도 없다. 일본에서는 인력파견업체들이 일용직 노동자가 일을 나간 날 도장을 찍어 준다. 이 같은 근무기록을 바탕으로 일용직도 고용보험·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일하는 사람이 혜택 보는 복지 시스템을\"

강석훈=교육을 못 받아서 빈곤이 대물림되는 현상을 막아야 한다. 월급 120만원을 받는 사람도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돈이 없어 못한다. 거창한 \'워킹푸어 종합대책\'을 세우기보다 \'근로 없이 혜택 없다\'는 원칙을 기둥 삼아 하나씩 문제를 풀어나갔으면 한다. 가령 대학생들에게 저소득층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하게 만들자. 이걸 학점으로 인정해 주고, 기업이 이 자원봉사 점수에 취업 인센티브를 주면 사교육을 받지 못하는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장준배=쉰이 넘은 구두닦이 아저씨로부터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서 나처럼 나이 많이 먹은 사람은 변화를 따라잡기 힘들다\'는 한탄을 들은 적이 있다. 새로운 형태의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도 좋지만, 전통적인 일자리도 어느 정도 살릴 것은 살려야 한다. 공(公)보육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부부들은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기고 일을 할 수 있어 좋고, 보육시설 근로자들은 일자리가 새로 창출돼서 좋다.

유경준=근로소득에 대해 세금을 환급해주는 근로장려세제(EITC)를 확대해야 한다. 전직(轉職)훈련도 활성화돼야 한다. 학력이 높고 전문 기술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무리 없이 전직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줘야 한다. 무작정 나눠주기보다는 일하는 사람에게 혜택을 많이 줘서 중산층으로 올라설 수 있게 만드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조성철=정부가 하고 있는 전직 훈련 프로그램을 산업 생산 현장에만 국한시키지 말자. 우리나라 사회복지 서비스 인력이 선진국의 20%가 안 된다. 산업사회에서 빠져나온 인력을 \'사회적 일자리\', 즉 사람에게 서비스하는 쪽으로 연결해 주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 워킹푸어(Working Poor·근로빈곤층)

\'일을 해도 가난한 사람\'이라는 뜻. 열심히 일해도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거나 간신히 웃도는 수준에 그치고, 저축을 못해 일자리를 잃거나 몸이 아프면 곧바로 절대빈곤으로 떨어지는 계층을 뜻한다. 미국에서 1990년대 중반 등장한 용어로, 2000년대 중반 이후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 EITC(Earned Income Tax Credit·근로장려세제)

저소득층 근로자에게 근로소득에 대한 세금을 환급해주는 제도. 극빈층에게 \'나눠주는\' 기능 중심으로 설계된 기본 사회복지제도들과 달리 열심히 일할수록 복지 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게 만든 제도다. 1975년 미국에서 고안된 제도로, 우리나라에는 올해 처음 도입됐다.

☞ 사회적 일자리

사회 전체적으로는 꼭 필요하지만 수익성이 낮아 민간기업이 뛰어들지 않는 각종 복지 서비스를 정부나 민간단체가 일정한 예산을 보태서 민간에 위탁하는 것. 방과 후 교실 보조교사, 간병 도우미, 장애인 방문 도우미 등이 대표적이다. 실직자들은 일자리가 생겨서 좋고, 국민들은 저렴한 사용료를 내고 일상생활의 불편을 덜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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